[기고] 역사 속의 산업혁명과 이즘(ism)의 형성: 4차 산업혁명시대 전망 2019-01-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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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첨부파일이 없습니다! 작성자 : 조재형 이메일 : jhjo@kofst.or.kr 조회수 : 7881 |
역사 속의 산업혁명과 이즘(ism)의 형성: 4차 산업혁명시대 전망 김명자 한국과총 회장 Ⅱ-1. 제2차 산업혁명(1870-1930년)과 현대산업사회 탄생 2차 산업혁명으로 ‘현대산업사회’가 탄생한다. 18세기 영국에서 비롯된 1차 산업혁명은 현대산업문명의 기반을 이룬다. 187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진행된 2차 산업혁명은 새로운 문명형태인 ‘현대산업사회’(Modern Industrial Society)를 탄생시켰다. 그렇다면 2차 산업혁명기, 기술혁신과 경제사회문화적인 영향은 어떻게 요약될 수 있을까. 미국을 본 고장으로 진행된 2차 산업혁명의 핵심 키워드는 철강, 석유, 전기다. 2차 산업혁명은 19세기 중반 독일의 화학염료 합성에서 시작된다. 이후 미국을 무대로 철도·강철·정유·전기·자동차·통신 분야가 얽히며, 드라마틱하게 전개된다. 이 문명사적 사건에서 1차 산업혁명의 원조인 영국은 독일과 미국에게 주도권을 내어준다. 역사는 기술혁신의 격동기에서 낙후된 국가가 앞으로 치고 약진할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2차 산업혁명기의 미국과 독일의 부상(浮上)이다. 섬유산업의 표백기술 2차 산업혁명은 염료의 인공합성에서 시작된다. 1차 산업혁명의 직물산업 기계화를 승계하고, 표백과 염색 기술에서 화학공업이 새로운 길을 닦는다. 산업혁명으로 공정장치가 자리 잡게 되자 대량생산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 때 표백기술은 무기화학에 의존했다. 회즙에 의한 알칼리 처리, 햇빛, 산패 우유에 의한 산 처리, 비누세척 반복 등의 옛날 방식에서 벗어나, 황산 표백으로 전환된다. 알칼리 처리는 삼림 파괴로 한계에 부딪친다. 1775년 프랑스과학아카데미(NAS)는 소금에서 소다를 얻는 기술에 현상금을 내걸기도 했다. 유리, 직물, 종이, 비누 제조에 알칼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1791년 프랑스 르블랑(Nicolas Leblanc)이 소다 제조 공장을 세우고, 1861년 벨기에 솔베이(E. Solvay)는 새로운 소다 제조법을 고안한다. 염료의 유기합성이 화학산업의 신세계를 열다. 2차 산업혁명기의 핵심 분야 중 하나는 화학산업이었다. 초기에는 염료의 유기합성이 선도한다. 당시 사정은 영국과 프랑스가 염료작물 시장을 독점하고 있었으므로, 독일은 돈을 주고도 사기가 어려웠다.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상황이 되니 ‘안보’ 차원의 이슈가 된 것이다. 이 무렵 19세기 중반 독일 기센(Giessen) 대학의 화학교수 리비히(J. V. Liebig) 실험실은 유기합성연구의 메카로 부상해 있었다. 그의 제자 호프만(A. W. Hofmann)은 콜타르로부터 아날린, 톨루엔, 벤젠을 분리해낸다. 이 쾌거로 독일은 프랑스를 따돌리고 선두주자가 된다. 최초의 인공염료 모브의 합성, 실패에서 얻은 행운 1856년 런던의 왕립화학칼리지(Royal College of Chemistry) 교수가 된 호프만의 실험실에서 제자 퍼킨(Sir W. H. Perkin, 1838-1907년)이 우연히 염료를 얻게 된다. 말라리아 치료제인 퀴닌(quinine)을 만들려던 과정에서 중간물질인 아닐린으로부터 청색염료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것이 세계 최초의 합성염료인 모브(Mauve, aniline purple 또는 Tyrian purple)의 탄생이었다. 퍼킨은 특허를 내고 공장을 세워 벼락부자가 된다. 1869년 화학자 카로(H. Caro)가 퍼킨보다 하루 앞서 알리자린 염료를 합성하여 특허를 신청하지만, BASF사는 퍼킨이 영국에서의 알리자린 생산권리를 갖도록 조치한다. 이후 여러 나라가 앞 다투어 아날린 염료를 합성하고, 다른 염료들도 계속 합성한다. 퍼킨은 인공향수도 개발한다. 1865년 케쿨레(F. A. Kekule)가 육각형의 벤젠 구조를 밝혀내면서, 유기화학은 합성기술에 날개를 달아준다. 실패의 결실, 인디고 합성으로 청바지 염색 1897년에는 인디고(indigo) 염료가 양산되기 시작한다. 1880년 이전에도 여러 경로의 합성법이 있었으나, 상용화에는 못 미쳤다. 1897년의 인디고 합성도 실패의 결실이었다. 당초 목적에 실패하고, 실수로 온도계를 깨뜨렸는데 그것이 행운이었다. 온도계에서 흘러나온 수은이 화합물을 만들고 그것이 촉매 역할을 했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1897년 독일의 BASF사가 인디고 판매를 시작한 후 5년 뒤에 획스트(Hoeschst)도 판매에 들어간다. 이후 여러 가지 인공염료가 합성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염료공업 발전은 환경오염을 유발하게 된다. 70년대에는 세계 염료 생산량의 15%가 염료의 합성과 처리과정에서 유실된다는 사실이 알려진다. 그리하여 염료 생산공정에 색소 오염물질 처리를 위한 흡착, 분해, 광분해, 생분해, 침전 등의 과정이 도입된다. 유기염료합성에서 독일이 메카가 된 이유 2차 산업혁명기 유기합성기술과 인공염료 개발의 중심이 된 나라는 독일이었다. 최초로 염료합성에 성공한 영국이 아니었다. 국가적 역량을 염료합성에 쏟은 독일의 산업화 전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독일 대학의 기초과학 연구가 축적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은 이 때 같은 성분이라도 합성 공정이 다르면 특허권을 따로 낼 수 있도록 특허법을 개정한다. 혁신 생태계 조성에서 바이엘, 획스트, 아그파 등 대기업의 기초연구 지원도 큰 몫을 한다. 산학연관 협력의 인프라가 구축된 것이다. 1865년 영국의 자동차 적색기법 미국에서는 1865년 남북전쟁 종전 이후 산업혁명의 수요가 절실해지고, 산업혁명의 기본 토양이 조성되고 있었다. 남북전쟁이 끝난 1865년 바로 그해, 영국은 자동차 적색기법(赤色旗法, The Locomotive Red Flag Act)을 제정한다. 내용인즉 우습다. 마차와 기차산업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 증기자동차 시속을 마차 속도로 제한한다(3.2km). 자동차 한대마다 운전사, 화부, 기수(旗手)의 세 사람을 배정한다. 낮에는 붉은 깃발, 밤에는 붉은 등을 들게 한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규제 관련해서 자주 언급되는 이 특이한(?) 법은 1896년에 가서야 기수를 없애도록 개정된다. 1차 산업혁명의 원조인 영국의 총생산이 19세기 후반에 급감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적색기법의 존재는 2차 산업혁명의 무대가 미국으로 넘어간 이유를 말해주는 상징성이 있는 것 같다. ‘누가 미국을 세웠는가?’, 금박시대(Gilded Age) 다섯 명의 타이탄 2차 산업혁명은 1차보다 더 광범위하게 극적으로 진행된다. 기술 시스템 혁신, 과학과 기술의 연결, 공학 분야 급성장, 거대기업 출현 등의 변화가 일어나고, 결국 새로운 문명형태인 현대 산업사회로 이행하게 되기 때문이다. 초기 산업혁명을 선도한 것은 철도산업이었다. 히스토리 채널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 8부작 ‘The Men Who Built America’는 2차 산업혁명의 무대였던 미국에서 어떤 인물들이 어떻게 미국을 만들고 있었는가를 흥미진진하게 연출하고 있다. 이 다큐에 등장하는 다섯 명의 거물(titan)이 미국을 세운 인물이다. 다섯이 누구일까. 시기 별로 철도산업의 코넬리우스 밴더빌트(Cornelius Vanderbilt, 1794-1877년), 거대 문어발 기업인 정유산업의 존 D. 록펠러(John D. Rockefeller, 1839-1937년), 이른바 철강 왕 앤드루 카네기(Andrew Carnegie, 1835-1919년), 전기·철강·금융산업 투자의 귀재 J. P. 모건(John Piermont Morgan, 1837-1913년), 그리고 제2세대로 포디즘(Fordism)의 주인공 헨리 포드(Henry Ford, 1863-1947년)가 그들이다. 전무후무한 부의 소유자로 세계 최고의 부자로 등극한 이들은 산업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적으로 미국을 좌지우지했고, 이들 사이의 경쟁과 암투는 전대미문의 대하드라마였다. 철도가 동과 서를 이어 한 나라를 만들다. 1870년까지만 해도 미국은 지역적으로 단절돼 있었다. 한 나라라고 하기엔 너무 멀어 단 세상이었다. 철도가 깔리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남북과 동서가 연결되기 시작한다. 의회는 1832년부터 국토 연결 노선을 논의하면서 1853년 펀드까지 조성하지만, 전쟁의 상처로 분단된 남과 북은 여전히 노선에 합의를 보지 못해 의회에서 계속 공전된다. 1862년 공화당 주도로 퍼시픽 철도법(Pacific Railroad Act)이 제정된다. 유니온 퍼시픽(Union Pacific)과 센트럴 퍼시픽(Central Pacific)의 두 개 회사에 토지와 자금을 지원해 대륙횡단 철도 건설에 착수토록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러 조치로 1866년 네브라스카 주 오마하(Omaha)와 캘리포니아 주 새크라멘토(Sacramento)로부터 북부 횡단 노선 건설에 착수한다. 일부 지역에서 건설되던 철도는 1865년에 미시시피 강 서쪽으로 연결된다. 1869년 드디어 서부와 동부가 유타 주에서 대륙 간 철도로 연결된다. 유니온 퍼시픽(Union Pacific) 철도와 센트럴 퍼시픽(Central Pacific) 철도 양대 회사의 회장이 유타의 프로먼터리(Promontory)에서 만나 횡단 노선을 연결하는 행사를 치른다. 미국 최초의 대륙 간 철도 개통으로 몇 달이 걸리던 대륙 횡단 시간은 8일로 줄어든다. 대륙횡단 철도 건설로 인해 웨곤 트레인으로 목숨을 무릅쓰는 여정을 거치지 않고도 산업화된 동부와 미개척의 서부가 연결된다. 이 역사적 쾌거 이후 미국 철도는 1870년에 57,000 마일로부터 1890년 167,000 마일로 길이가 확장된다. 20년 사이에 3배로 늘어난 것이다. 철도가 거미줄처럼 연결되자 사람은 물론 냉동기술 개발로 축산업이 산업화되고, 곡물 등 온갖 물자를 실어 나르게 된다. 남부 퍼시픽 철도 회사의 스탠포드 회장, 스탠포드 대학 설립 1861년 남부 퍼시픽 철도 회사 회장이 된 스탠포드(Amasa Leland Stanford, 1824–93)는 ‘robber baron’이라 불릴 정도로 악덕 기업가로 알려졌다. 그는 골드러시 때 뉴욕으로부터 캘리포니아로 이주해, 금광과 철도산업에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막대한 부를 쌓았다. 정계에 진출해 1861년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지내고, 8년간 상원의원을 역임한다. 스탠포드는 1885년 스탠포드 대학(Leland Stanford Jr. University)을 설립한다. 1891년에 개교한 스탠포드 대학의 초기 설립 목표는 농업 연구였다. 첫 번째 입학생인 후버(Herbert Clark Hoover, 1874-1964)는 31대 대통령이 된다. 윌슨 대통령은 1917년 그를 식량국장(US Food Administrator)에 임명했고, 하딩 대통령과 쿨리지 대통령 행정부에서 상무부장관을 지낸다. 이 때 후버 댐(Hoover Dam)과 해로(St. Lawrence Seaway)를 건설한다. 그의 대통령 임기(1929-33년, 공화당)가 시작된 지 7개월 만에 증권시장 폭락 등 대공황을 겪는다. 국정의 시험대에 오른 그는 ‘자본주의는 잘못이 없고, 자본가의 욕심이 문제’라면서, 정부의 직접적인 개입보다는 자유주의(Voluntarism)로 해결한다는 정책을 편다. 시간에 쫓기면서 그의 정책은 성과를 내지 못한 채, 비난 속에서 1933년 재선에 도전한다. 결국 민주당의 프랭클린 루스벨트에게 대패한다. 해운왕 밴더빌트 제독의 증기선 항로 19세기 산업혁명 초기 해운업과 기차산업에서 자수성가한 거물이 코넬리우스 밴더빌트(Cornelius Vanderbilt, 1794-1877)다. 그는 11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아버지를 도와 뉴욕 스태튼 아일랜드(Staten Island)와 맨해튼을 왕복하는 카고 배 운영을 거든다. 1817년에는 뉴욕과 뉴저지를 왕래하는 증기선 페리의 선장을 지내며, ‘해운업이 미래’라고 확신한다. 1820년대 후반부터 증기선을 제조하고, 경쟁자는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제거한다. 그런 과정을 거쳐 뉴욕 지역의 페리 라인을 장악하고, 미국 최대 증기선을 운영하게 된다. 1850년대 초 캘리포니아 골드러시(Gold Rush)가 시작되던 시기, 그러나 아직 대륙 간 철도가 개통되기 이전에, 그는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니카라구아를 경유하는 신항로를 개설한다. 그 항로는 기존의 파나마 경유에 비해 항해 시간이 짧았다. 남미의 케이프 혼을 거치는 몇 달 걸리는 경로와는 비교가 안 됐다. 신항로 개척으로 그는 매년 1백만 달러(현재 기준 2천6백만 달러)를 번다. 남북전쟁 때는 가장 크고 빠른 증기선(Vanderbilt호)을 북군 해군에 기부한다. 제독 밴더빌트의 철도 엠파이어 그의 이름 앞에는 항상 제독(Commodore)이란 별명이 붙어 다녔다. 냉혹하고 대마불사의 기업가로서, 1860년대 그의 말년에는 해운업에서 철도산업으로 전향한다. 다시 철도에서 또 하나의 왕국을 세운 그의 경영철학은 시장 독점에 의한 낮은 가격과 최고의 효율 추구였다. 2차 산업혁명기에는 그 경영 원리가 부의 축적의 지름길이었다. 1860년대 철도의 급성장 시기에 그는 시카고-뉴욕 간 노선을 운영한다. 이 변화는 철도 역사에서의 대전환을 의미했다. 단거리 노선으로 뿔뿔이 운영되던 철도 시스템을 여러 개 주를 잇는 네트워크로 통합했기 때문이다. 그로써 표준화에 의해 비용을 낮추고 효율을 높이는 여행과 운송의 황금기를 열게 된다. 밴더빌트는 1871년에 개통한 맨해튼의 그랜드 센트럴 역(Depot)의 주역이었고, 훗날 1913년에 개장한 현재의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의 전신이었다. 조지 풀먼 카, 세계 최고 호텔 미국 산업혁명의 시작은 기차산업이었다. 기차산업의 융성에서 카네기의 철강 대량생산, 웨스팅하우스의 에어 브레이크(air brake)와 기어(friction draft-gear) 개발, 풀먼의 침대차 호텔은 핵심 키워드였다. 조지 풀먼(George Pullman, 1831-97년)은 장시간 기차로 출퇴근을 하면서, 좀 더 편한 기차를 설계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해결에 나선다. 그는 기존의 침대차를 개량해서 1863년에 파이오니어(The Pioneer) 모델을 개발한다. 그러나 폭이 넓어서 플랫폼과 트랙 등을 개조해야 했다. 때문에 도입되지 못한다. 그러던 중 1865년 링컨 대통령이 암살되면서 그 시신을 워싱턴 DC로부터 일리노이 스프링필드(Springfield)로 운구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 때 풀먼 침대차(Pullman Sleeping Car)가 동원되고, 그에 맞춰 기차 회사가 개조에 나선다. 풀먼(George Pullman, 1831-97년)의 등장은 미국 기차산업의 일대 사건이었다. 우선 침대차, 식당차(dining cars), 팔러(parlor cars)의 도입으로 기차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리고 노동자들과의 불화와 층돌로 노동운동을 촉발시킨다. 회사는 ‘안전하고 편안하게 여행하고 잠자기’(Travel and Sleep in Safety and Comfort)를 모토로 1만 여개의 침대차를 세계 최고의 호화 호텔로 운영한다. 1894년 풀먼 스트라이크 1894년에는 풀먼 스트라이크(Pullman Strike)가 발생한다. 미국 최초의 전국적인 스트라이크였다. 2개월 이상 지속된 철도 파업으로 전국의 2/3 이상 지역의 화물과 여객 수송이 마비된다. 결국 이 사태는 노동법 개정을 촉발한다. 이 스트라이크는 풀먼 시카고 공장의 4천명 직원이 회사 측의 임금 삭감에 항의해 파업에 돌입하고, 양측의 충돌에서 30명의 근로자가 사망한 사건이었다. 포터 노조의 스트라이크 1893년 뎁스(Eugene V. Debs) 주도로 노동조합 ARU(American Railway Union, ARU)가 결성된다. 그러나 미숙한 조직으로 회사에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파업에 들어간다. 이 때 포터와 감독 그룹은 동참하지 않는다. ARU는 풀먼 차를 운영하는 모든 열차로 파업을 확대시켜, 한 때 최대 27개 주에서 25만 명의 노동자가 스트라이크에 동참한다. 일부 단체(Railroad brotherhoods, American Federation of Labor, AFL)는 보이콧에 반대하고, 철도감독협회(General Managers' Association of the railroads)도 반대편에 선다. 이 폭동에서 30명이 사망하고, 8천만 달러의 손해가 발생한다. 연방정부는 노조와 주동자 뎁스 등에게 강제명령을 내리고, 우편 자동차를 운반하는 기차를 방해하지 말 것을 명령한다. 이에 불응하자 클리블랜드(Stephen Grover Cleveland, 1837-1908) 대통령은 군대를 출동시켜 진압한다. 여러 도시에서 폭력 사태가 벌어지다, 결국 파업은 중단된다. 뎁스는 법원 명령을 위반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ARU는 해산된다. 클리블랜드 대통령, 기차산업의 독점적 운영 규제 법 제정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남북전쟁 이후 여섯 차례 대선에서 잇달아 민주당이 공화당에게 패한 뒤 어렵사리 당선된 최초의 민주당 출신 대통령이었다. 그리고 1861년부터 1933년까지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과 함께 단 둘이 민주당이 배출한 대통령이었다. 또한 미국의 22대(1885-89년)와 24대(1893-97년) 대통령을 역임해, 4년 간격을 두고 재선에 성공한 유일한 미국 대통령이었다.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첫 번째 임기 중인 1887년에 ICA(Interstate Commerce Act) 제정으로 철도산업의 독점적 운영을 규제한다. 내용은 철도요금은 ‘합리적이고 적정해야’(reasonable and just)하며, 운임을 공표해야 하며, 요금 차별을 금지하는 등이었다. ICA는 미 연방정부 최초의 민간기업에 대한 규제였다. 그리고 모니터링에 의해 이 법의 준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연방규제기구(Interstate Commerce Commission, ICC)를 설치한다. ICC는 규제 조치의 모델로서 다른 분야의 조직에도 벤치마킹 대상이 된다. 독립적인 커미션으로 규제 대상인 기업과는 연관이 없는 인력구조로 운영된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기차 노동법 개정 풀먼 카 포터는 1920년 주당 100시간 일하고, 저임금에 묶여 있었다. 일에 대해 불평하면 곧바로 해고됐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1925년에는 랜돌프(A. Philip Randolph, 1889-1979년) 주도로 침대차 포터 연합체(Brotherhood of Sleeping Car Porters)가 결성된다. 흑인 기차 노동자와 메이드(maid)의 인권 보호가 목표였다. 1932년 루스벨트 대통령은 취임한 뒤 곧바로 의회를 설득해 법 개정에 나선다. 포터 등 기차 노동자와 항공산업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기차 노동법(Railway Labor Act)의 개정이었다. 당초 1926년에 제정된 이 법은 1934년과 1936년에 개정을 거친다. 그로써 12년간 노조를 무시하던 풀먼 카 측은 노조와의 협상에 나선다. 1937년에는 드디어 노동계약이 타결된다. 노조의 주장을 대부분 수용해, 임금 인상, 1주에 60시간 노동, 야간근무 시 4시간 수면 등을 허용한다는 내용이 담긴다. 랜돌프는 ‘시민권(Civil Rights)의 할아버지’라 불렸다. 1969년에 풀먼 카 시대는 막을 내린다. 웨스팅하우스의 기업 경영 웨스팅하우스(George Westinghouse, 1846-1914년)는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가이자 가장 위대한 인더스트리얼리스트(Industrialist)였다. 또한 탁월한 발명가였다. 그는 완벽하게 이상적인 경영자였다. 그의 공장에서는 미국에서 유일하게 단 한 건의 스트라이크도 없었다. 그 당시의 노사갈등 상황에서는 지극히 예외적인 일이었다. 미국 노동조합 회장은 ‘만일 웨스팅하우스와 같은 사람이 회사 경영자라면, 우리 조합은 존재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니콜라 테슬라는 웨스팅하우스를 세상에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 가장 훌륭하고 존경하는 인물이라 했다. 1854년 캔자스-네브라스카법으로 노예제 여부 결정 피어스 대통령은 사가들에 의해 최하위권의 평가를 받는다. 그 이유로는 노예제를 둘러싼 갈등에 대한 우유부단한 대응이 꼽힌다. 취임 이듬해에 통과된 1854년의 캔자스-네브라스카법(Kansas–Nebraska Act)은 노예제 허용 여부를 캔자스 구역(territory) 주민의 일반투표(popular vote)로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미국 지도를 보면, 노예제를 반대하는 유니온 주(Union States)와 노예제를 찬성하는 남부연합(Confederate States), 노예제를 채택한 남부 주 가운데 북부와 타협 태도를 보였던 경계 주(Border States), 그리고 노예제를 결정하지 않은 서부 등으로 구획돼 있다. 노예제를 기준으로 국가가 완전히 분열된 상태였다. 블리딩 캔자스 사태 캔자스-네브라스카법은 계속 논란에 휩싸인다. 노예제를 허용 또는 불용한 상태에서 캔자스 테리토리가 유니온에 가입할 것인가를 놓고, 폭력 사태가 벌어진다. 1854-61년 사이 블리딩 캔자스(Bleeding Kansas) 또는 경계 전쟁(Border War)이라는 일련의 유혈사태가 그것이다. 캔자스와 이웃 미주리까지 노예제 찬성 측(Border Ruffians)과 반대 측(Free-Staters)으로 갈라져 폭동과 살인 등 극심한 사회혼란이 초래된다. 이처럼 14대 피어스 대통령 때부터 벌어진 폭력사태는 15대 뷰캐넌 대통령 임기 중에도 계속되고, 16대 링컨 대통령 때 급기야 남북전쟁으로 폭발하게 된다. 미국의 아이콘 링컨 대통령 공화당을 창당한 링컨은 1860년 대선에서 미국 역사상 최초의 공화당 출신의 대통령이었다. 당시의 선거 이슈는 노예제였다. 1861년 남부연합(Confederate States of America) 7개 주는 멕시코-미국 전쟁(1846-48년)의 영웅 제퍼슨 데이비스(Jefferson Davis, 1861-65년)를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이미 1860년에 사우스캐롤라이나는 분리독립을 했고, 6개 주가 유니온을 탈퇴한다. 링컨은 원래 보수주의 편이었고, 노예제가 서부로 확대되는 것을 막아 현상 유지를 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당시의 복잡한 상황을 관리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점차 진보적인 성향으로 바뀌고, 노예제 폐지를 목표로 삼게 된다. 링컨의 재선 성공 1864년 무렵에는 사회적으로 종전을 원하는 분위기로 돌아선다. 대선 일정을 앞두고, 선거 두 달 전부터 북군의 전세가 호전된다. 링컨은 재선에 성공하고, 1865년 3월 취임식을 한다. 그는 첫 번 취임 때와는 다른 새사람이 돼 있었다. 그의 정치적 지향은 모두를 위한 인류애(Humanity for All), 모두를 위한 자비(Charity for All)였고, 평화와 재건이 목표였다. 1865년 4월 남부군의 리 장군은 항복한다. 남북전쟁 이후부터 현충일(Memorial day, Decoration Day)이 생기고, 1971년부터는 모든 전몰 병사를 기리며 공무원들이 사흘 연휴를 갖도록 5월의 마지막 월요일로 통일한다. 링컨, ‘제2차 미국혁명’의 아버지 그의 리더십과 공화당의 지원으로 1865년 노예제가 폐지된다. 미국을 하나의 국가로 통일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링컨은 ‘제2차 미국혁명’의 아버지라 불린다. 미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으로 기록된다. 링컨은 연설을 직접 썼다고 한다. 대통령이 되기 전후의 연설문 중 11가지가 유명 연설로 꼽힌다. 그 중 특히 다섯 가지의 초안이 알려진 1863년 11월 펜실베이니아 게티스버그 연설문과 1865년 4월 재선 취임 연설문이 감동적이었다. 남북전쟁 전후를 정치 지도자로 살았던 링컨은 분열을 통합으로 이끄는 과정에서 민심의 중요성을 이렇게 피력했다. “민심이 전부다. 민심을 얻으면 못할 것이 없다; 민심을 잃으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결국 민심을 얻는 이가 법령 제정이나 정책 결정을 하는 사람보다 더 깊이 들어간다.(Public sentiment is everything. With public sentiment, nothing can fail; without it nothing can succeed. Consequently, he who moulds sentiment goes deeper than he who enacts statutes or announces decisions.) 기계화와 노예제 위에서 본 것처럼, 미국은 19세기 후반까지도 노예제를 둘러싸고 극심한 분열을 겪고 있었다. 남부지역이 노예제를 고수한 배경으로는 면화업이 1860년대까지 수출산업의 60%를 차지했고, 미국의 독자적인 코튼 진(Cotton Jin, 조면기)의 발명이 그 효율을 높였고, 면화업의 유지에 일손이 필수적이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본격적인 2차 산업혁명 이전에 북부는 증기기관을 사용하는 면직물 등의 공장이 확산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제조업의 기계화에 따라 노예제의 경제적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약화된다. 이들 산업적, 사회적 요소가 수십 년의 갈등 끝에 미국이 노예제를 폐지하게 되는 요인으로 작용한 측면이 있다. 미국 ‘산업혁명의 아버지’ 슬레이터 18세기 후반부터 미국의 제조업 혁명에 기여한 인물이 영국 출신의 엔지니어 새뮤얼 슬레이터(Samuel Slater, 1768-1835년)였다. 그는 카트라이트와 동업을 했던 스트러트(Jedediah Strutt) 밑에서 도제 훈련에 의해 7년 동안 수력방적기 기술을 습득한다. 그 뒤, 1789년 미국으로 건너가 면직물 공장을 차린다. 이후 크게 성공하면서, 동북부에 공장 시스템을 구축한다. 그 공로로 앤드루 잭슨 대통령(1829-37년)으로부터 ‘미국 산업혁명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는다. 한편 슬레이터가 미국으로 건너 올 당시 영국은 특허와 기술 유출을 막기 위해 엔지니어의 이민을 금지하고 있었다. 영국은 그를 ‘배반자 슬레이터’라 했다. 브레이크맨이 따로 있어 기차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다시 기차 얘기로 돌아가면, 19세기 중반 기차산업 시대, 브레이크맨(brakeman)이란 직업이 따로 있었다. 기차 운전사가 호루라기를 불면 차량마다 뛰어다니며 한 대씩 따로 제동을 해야 기차를 세울 수 있었다. 한번 정차하려면 이런 과정을 거치노라 2마일은 가야 기차가 멈출 수 있었다. 기차가 많이 보급되고, 속도가 빨라지고, 차량을 길게 달면서 사고도 더 잦아진다. 브레이크맨의 작업은 매우 위험해서, 한 해에 5천 명이 목숨을 잃는 정도였다. 웨스팅하우스의 에어브레이크 개발 기차의 안전성에 착안한 웨스팅하우스는 피츠버그로 가서 1868년에 기차용 에어브레이크를 개발한다. 사람들은 ‘바람으로 기차를 멈추게 한다.’는 것은 정신 나간 짓이라고 했다. 1869년에는 시범적으로 에어브레이크 시연을 한다. 말 두 마리와 기차가 충돌하게 된 상황에서 기차의 에어브레이크는 급제동에 성공한다. 기차 산업 관계자들은 감탄을 한다. 제동장치가 온전히 작동한다는 것은 엄청난 기술혁신이었다. 기차를 더 길게 여러 칸을 연결하고, 하중이 무거워도 됐기 때문이다. 1869년 웨스팅하우스는 피츠버그에 에어브레이크 공장을 세우고 계속해서 개량한다. 1889년 공장은 대규모로 확장되고, 노동자들을 위한 시설을 건설한다. 공장과 집에도 가스, 수도, 전기 등 시설을 갖춰 편하고 안락했다. 공장에는 병원과 의사 등을 상주시키고, 공장의 안전에 완벽을 기했다. 그는 노동자들에게 토요일 오전 근무만 하도록 조치한다. 카네기나 다른 경영자들은 마땅치 않게 여겼다. ‘사회 진보를 위한 기술’ 여객용 기차에는 에어 브레이크가 장착되기 시작한다. 뉴욕 센트럴의 밴더빌트 사는 장착을 꺼린다. 웨스팅하우스는 거절하는 회사 임원에게 ‘내가 더 젊으니 기다릴 것’이라고 답한다. 화물용 기차에는 에어브레이크 장착의 추가 비용을 들이는 것을 기피한다. 브레이크맨은 주급 1달러 50센트면 해결되는데, 에어브레이크 장착에는 5달러가 들어갔기 때문이다. 심지어 의회에 로비를 해서 ‘이익이 잘 나고 있는 사업을 왜 흔드느냐.’고 에어브레이크 장착을 방해한다. 웨스팅하우스 회사의 슬로건은 ‘You Can Be Sure....If It’s Westinghouse'였다. 그에게는 기업의 이윤이 목표가 아니었다. 사회 진보가 목표였다. 기술은 사람들에게 이로워야 하고, 인류사회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고 믿는 도덕적인 기업가였다. 19세기 후반 철강산업이 미국을 바꾼다. 켈리의 강철 공법 철도산업의 확대는 철광석과 선철(pig iron)에서 강철(steel)을 만드는 공정이 개발되면서 급진전된다. 강철은 철-탄소 합금으로 2% 정도의 탄소 함유로 강도가 훨씬 강해진다. 그러나 당시의 공법은 소량생산에 그쳤으므로 가격이 비쌌다. 장식품 정도를 만들 수 있을 뿐, 철도 건설에 쓰는 건 상상하기 어려웠다. 강철의 대량생산 공정도 영국과 미국에서 거의 같은 시기에 일어난 동시발명의 사례다. 미국부터 보자. 켄터키 주에서 철공장을 운영하던 윌리엄 켈리(W. Kelly, 1811-88)는 용융된 선철(pig iron)에 공기를 불어넣으면 불순물인 탄소가 제거되고, 용광로의 온도를 더 높여준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불을 덜 때도 온도를 유지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영국 베서머의 철강 생산 특허 그러는 사이 1855년 영국에서 헨리 베서머(Sir Henry Bessemer, 1813-98년)가 같은 방법의 철강 생산 공정의 특허를 얻는다. 베서머 공정은 1850년대 크리미아 전쟁(1853-56년)에서 대포 제조를 위한 대량생산 공법의 연구 결실이었다. 기존의 공법(Bloomery)은 철도 라인 한 조각 제작에 필요한 강철을 생산하는데 2주일이 걸렸다. 그러나 베서머 공법으로 같은 물량을 15분 만에 생산할 수 있는 대량생산체제가 가능해진다. 베서머는 1856년 미국에서 공기주입법으로 여러 개의 특허를 신청한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윌리엄 켈리는 개발의 우선권을 주장하며, 미국 특허를 신청한다. 그리하여 1857년 베서머보다 앞서 켈리가 미국 내 특허를 획득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미국의 강철 생산량은 1870년 77,000 톤으로부터 1900년 1,140만 톤으로 급증한다. 그러나 초기에는 여전히 강철의 가격이 비쌌다. 대량생산으로 그 가격을 내린 것이 앤드루 카네기였다. 앤드루 카네기, '강철이 산업의 미래다.’ 앤드루 카네기(Andrew Carnegie, 1835-1919년)의 철강산업 스토리도 흥미진진한 에피소드로 가득하다. 카네기는 비싼 가격 때문에 장식품 제조에 쓰이던 강철을 싼 값에 대량생산한다. 그리고 철도, 빌딩 등 건설에 써서 현대도시의 구조를 구축한다. 그는 12살에 스코틀랜드로부터 이민 와서 면직물 공장에서 허드렛일부터 시작한다. 성공한 뒤 고향을 자주 다니는데, 영국 방문에서 베서머 공정을 보고, ‘이것이 산업의 미래’라고 생각한다. 카네기 스틸 코포레이션 1862년에 베서머의 쉐필드(Sheffield) 공장을 방문한 미국의 홀리(Alexander Holley, 1832-82년)는 그 라이선스로 뉴욕에 철강 공장을 세운다. 카네기는 자본을 대서 1872년 철강공장(Edgar Thomson Steel Works)을 세우고, 철도용 강철의 대량생산에 들어간다. 그의 경영철학도 저임금과 효율화가 키워드였다. 카네기는 헨리 프릭(H. Frick)의 제안을 수용해 1892년 회사 합병으로 카네기 스틸(Carnegie Steel Corporation)로 확대한다. 카네기 공장이 입지한 피츠버그는 1870년대부터 ‘세계 최고의 철강도시’가 된다. 1874년 세계 최초의 철교 ‘이즈 브리지’ 완공 카네기의 사업 수완을 증명하는 에피소드가 이즈 브리지(Eads Bridge) 건설이다. 카네기의 청장년기의 멘토였던 펜실베이니아 철도의 토머스 스콧(Thomas A. Scott, 1823-81년)은 센트 루이스(St. Louis Missouri)에 철교를 건설하라고 한다. 미시시피 강을 가로지르는 철교 도면 설계는 공학자 이즈(James B. Eads, 1820-87년)가 했다. 강철 생산량과 적기의 자금 확보 등 온갖 시련 끝에 1874년 세계 최초로 금속 아치의 도로와 철도를 겸한 철교가 건설된다. 다리 이름은 설계자의 이름을 따 이즈 브리지(Eads Bridge)가 된다. 카네기 회사 경영의 두 얼굴 카네기의 강철사업은 두 얼굴로 경영된다. 그는 기업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거친 성품으로 악명이 높았던 헨리 프릭(Henry C. Frick, 1848-1919년)에게 맡긴다. 자신은 뒤로 물러나 프릭의 노동자 탄압 행위를 방조한다. 프릭은 수단 가리지 않고 임금을 삭감해 기업 이윤을 극대화하고, 스트라이크(Homestead Strike)를 총격으로 강제 진압하는 등 엄청난 사태를 유발시킨다. 존스타운 홍수, 미국 최악의 인재 프릭과 카네기 등은 1879년 그들 특정 회원만 입장 가능한 호화 사교클럽(South Fork Fishing & Hunting Club)을 만든다. 프릭은 자신이 다니는 통로를 넓힌다고 안전성을 무시하고 댐(South Fork Dam)을 개축한다. 그리하여 1889년에 미국 역사상 최악의 인재로 기록되는 존스타운 홍수(Johnstown Flood)가 발생한다. 미국이 겪은 재난에서 9.11 사태의 피해가 더 크긴 했지만, 그것과는 성격이 전혀 다른 인재였다. 1901년 카네기 스틸, 모건에게 매각 1901년 J. P. 모건은 카네기의 측근을 통해 카네기 스틸을 원하는 값에 넘기라고 제안한다. 카네기는 메모지에 4억8천만 달러 액수를 적어준다. 모건은 두 말 않고, 그 액수에 카네기 스틸을 인수한다. 그리고 카네기에게 월급여로 100만 달러를 지급하기로 한다. 모건은 ‘세계 최고 부자가 된 것을 축하한다.’고 말한다. 모건은 다른 회사까지 합병해서 US. 스틸이라 명명한다. 세계 최대, 최고의 강철회사의 탄생이었다. 1896년 대통령 선거에서 세 명의 타이탄은 맥킨리를 당선시킨다. 2차 산업혁명의 중반기 1896년 미국은 대통령 선거를 치른다. 이런 분위기에서 민주당 유력 후보로 등장한 것은 반기업, 친노동 편에 선 윌리엄 브라이언(W. J. Bryan, 1860-1925년)이었다. 이 선거에서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니게 된 세 거물, 모건, 록펠러, 카네기는 브라이언을 꺾을 공화당 후보를 만들어낸다. 공화당이 뽑은 후보를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친기업의 후보를 내세운 것이었다. 그 후보로 오하이오 주지사인 윌리엄 맥킨리(William Mckinley, 1843-1901년)가 선택된다. ‘기업의 기업에 의한, 기업을 위한’ 나라? 브라이언은 사상 최초로 전국 순회 유세에 나서 500회 이상의 대규모 대중 연설을 한다. 미국 대선의 새로운 선거운동 모델이었다. 결과는 맥킨리의 압도적인 승리로 나타난다. 그로써 19세기 말 미국은 ‘기업의, 기업에 의한, 기업을 위한’ 나라를 더욱 굳히게 됐다는 해석이다. 세 명의 마그넷(magnet)은 그동안 하던 방식대로 거침없이 독점체제의 기업 경영을 지속한다. 1900년 선거에서도 맥킨리가 재선에 성공한다. ‘Corporate America’를 공고히 한 것이다. 이 무렵 부상하고 있었던 정치인이 시오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1858-1919년)다. 그는 뉴욕의 부유한 가문 출신이라는 이미지를 서민형으로 바꾸는 데 성공하고, 정치적 부상을 준비한다. 이들 세 명의 거부는 의도적으로 루스벨트를 부통령으로 만든다. 부통령은 할 일이 별로 없는 자리라서 그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대통령으로 나서는 것을 막는 좋은 길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의 전략적 의도는 빗나간다. 1901년에 맥킨리 대통령이 연설 차 버펄로로 가는 길에 저격당하고, 8일 만에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로써 시오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1901-09년 재임)는 미국 역사상 최연소인 43세 나이로 대통령 자리에 오른다. 이때부터 1892년에 제정된 안티트러스트 법을 놓고, 문어발식 경영의 대기업과 정부와의 대결이 시작된다. 첫 번째 타깃은 모건이었고, 실무자끼리 해결하자는 모건의 제안을 거절하고, 해체 수순을 밟는다. 풀먼 카,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 사 등도 같은 운명이 된다. 2차 산업혁명기 정유산업의 태동 20세기 문명은 석유문명이라고 한다. 19세기 이전 석유는 여러 지역(Babylon, Egypt, Philippines, Rome, Azerbaijan)에서 쓰이고 있었다. 그러나 석유산업 차원으로 보면 1846년 캐나다의 게스너(Abraham Gessner)가 석탄으로부터 등유를 추출하는 공정을 개발한 것이 초기 사례다. 1850년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영(James Young)은 역청탄과 혈암으로부터 석유를 증류하는 방법을 고안해낸다. 1854년에는 폴란드에서 등유를 만들기 시작한다(Ignacy Lukasiewicz). 최초의 대형 정유시설이 건설된 것은 1856년 루마니아의 플로에스티(Ploesti)에서였다. 북미에서는 캐나다 온타리오의 윌리엄스(James Miller Williams)가 1858년에 최초로 유정을 개발한다. 록펠러의 등장 화석연료가 기술과 산업의 영역으로 들어와 본격적인 정유산업이 태동한 것은 2차 산업혁명 때였다. 기존의 여러 가지 방식은 원유를 유정으로부터 직접 퍼 올려서 공장 체제로 정유하는 것에 비할 수는 없었다. 미국에서는 1859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에드윈 드레이크(Edwin Drake)가 원유 시추에 성공한다. 미국이 주도하는 석유산업시대를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록펠러(John D. Rockefeller, 1839-1937년)는 23세에 정유사업에 손을 대기 시작한다. 16세에 가게 직원으로 일하며 모은 돈이 종자돈이 됐다. 27세 때 동업으로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에 작은 정유회사를 차린 뒤, 1870년에는 독립한다. 그는 19세기 중반의 기술 수준에서 원유 채유부터 손대는 것은 리스크가 크다고 보았다. 그래서 초기에는 정유산업에 치중하다 차츰 영역을 넓히게 된다. 스탠더드 오일 사의 확장 그의 스탠더드 오일 사(Standard Oil Company)는 계속 가지를 쳐서, 1880년 뉴욕, 필라델피아, 피츠버그, 클리브랜드에 정유공장을 세운다. 그로써 1880년대 세계 정유 유통량의 90%을 점유한다. 그는 금박시대(Gilded Age) 미국 산업가들의 경영철학이 그랬듯이, 중앙집중화에 의해 효율화를 기하고, 가격을 낮추고, 생산체제와 시장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확신의 소유자였다. 정유의 수송은 기차에 의존했으므로 록펠러는 기차사업의 핵심 고객이 된다. 그는 기차 제국의 제왕 격인 밴더빌트와 배짱 좋은 딜로 협상해, 독점 계약을 따낸다. 그 뒤 기차산업의 거물들과 줄다리기를 계속하다가 아예 자체적으로 수송 파이프라인을 건설한다. 1911년 안티트러스트 법에 의해 독점체제 해체되다.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 사(41개 기업)는 최대 규모이자 최초의 다국적 기업으로 수직적, 수평적 통합 체제를 갖춘다. 독점 자본주의의 대명사인 록펠러는 평생 기업 간의 경쟁을 금기로 여겼고, ‘경쟁은 죄악’(Competition is a sin.)이라고 말한다. 회사는 1892년에 제정된 안티트러스트법(Sherman Antitrust Law)에 근거한 오랜 소송(US Government vs. Standard Oil Co.)에 휘말린다. 그 결과 대법원 판결로 1911년 34개 기업으로 해체된다. 크래킹 법으로 가솔린 증산 스탠더드 오일 사는 정유과정에서 휘발유를 많이 값싸게 빼내는 게 절실했다. 1911년 스탠더드 오일사의 정유공정 책임자인 버튼(W. Burton)은 크래킹 방식을 고안한다. 가열 가압 증류 과정에서 섭씨 400도로 가열하니, 말간 기름이 두 배 수율로 얻어졌다. 21년에 버튼은 그 공로로 퍼킨 메달을 받는다. 그때 그는 탱크 폭발이 일어날 지도 모르는 위험한 방식이었다고 털어놓는다. 이후 공정 개선으로 연속 크래킹법이 보급된다. 정유산업은 자동차의 대량생산 체제에 힘입어 10년 내에 최고 산업으로 부상한다. 사회적 인프라도 바뀐다. 타이어 산업이 대형화된다. 1925년 도로 건설 공법에서는 클로버 잎새 형태의 고속도로 교차 방식이 나타난다. 이후 록펠러의 석유산업은 전략적으로 의약산업과 농약 생산 등 그린혁명으로 영역을 넓힌다. 농업기술은 2차 산업혁명에서도 중요했다. 19세기 중반에는 증기기관으로 작동되는 쟁기가 개발돼 경작이 가속화된다. 그 결과 소맥, 대맥 등의 평균 수확량이 30% 늘어난다. 기계영농에 의해 세계적으로 농작물 생산이 급증한다. 미국의 경우 1860-1910년 사이 경작지 면적은 2배, 생산량에서 밀은 4배, 옥수수는 3.5배, 면화는 3배 증가한다. 2차 산업혁명기 농기계 개발은 기계영농시대의 서막이었다. 미국의 농업에서 가장 획기적인 기계는 면화에서 씨를 빼내는 ‘코튼 진’(Cotton Jin)이었다. 영국에서 비롯된 1차 산업혁명의 핵심인 직물산업은 방적기, 역직기 등의 새로운 기술혁신에 의해 가능했다. 그러나 면화에서 씨를 빼내는 조면기는 미국의 발명이었다. 코튼 진이 면화산업을 혁신하다. 1차 산업혁명 당시 미국에서 개발된 코튼 진은 작지만 획기적인 발명이었다. 1793년 북부(Massachusetts)에서 남부를 방문한 양키 휘트니(Eli Whitney)가 발명한 간단한 장치였다. 영국의 직물산업이 발전하면서 미국의 면화는 큰 시장을 갖게 된다. 그 때 가장 장애가 된 것이 면화에서 씨를 빼내는 과정에 일손이 가장 많이 든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코튼 진은 축복이었다. 휘트니는 코튼 진의 특허를 내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복제가 돼서 널리 퍼져나간다. 코튼 진의 보급은 미국 면화산업의 수익성을 크게 높여준다. 목화를 따는 노예만 있으면 수익이 보장되는 것이었다. 미국 남부지역은 다른 농작물을 제외하고 목화를 계속 심는다. 그러다 보니 일손을 위해 노예제도를 유지하게 된다. 코튼 진은 크기가 커지고 증기관에 의해 가동된다. 그러나 결국 북부로부터의 산업혁명의 전파로 노예제도는 폐지된다. 기계화가 노예 유지보다 경제적으로 더 싸졌다는 것이 노예제도 폐지의 한 가지 이유였다. 콤바인에서 트랙터로... 농작물을 손으로 거두어들인다는 것은 엄청난 일손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농작물 수확을 위해 리퍼(reaper), 탈곡기(thresher), 철제 쟁기(steel plow) 등이 쓰이고 있었고, 이 세 가지 기능을 합친 컴바인(combine)이 개발된다. 컴바인은 밀, 보리, 옥수수 등 거의 모든 곡물의 수확(reaper), 탈곡(thresher), 까부르기(winnowing)를 하나의 과정으로 처리함으로써 효율을 높였다. 미국에서는 1835년에 무어(Hiram Moore)가 최초의 컴바인 특허를 획득한다. 여러 마리의 말의 힘을 빌려 넓은 면적의 곡식을 수확하게 된다. 1890년에는 가솔린으로 가동되는 트랙터가 출현한다. 트랙터는 수천 년 동안 농사의 파트너였던 말과 소의 힘을 대신하게 된다. 1862년 홈스테드 법이 만든 농업혁신 이들 기계 영농화 못지않게 산업혁명기의 농업 발전을 촉진한 것은 1862년에 제정된 홈스테드법(Homestead Act)이었다. 이 법은 둘 중 하나를 택하게 한다. 가구당 10달러를 내면 160에이커의 농지를 무상으로 임대해 5년간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또는 1에이커 당 1.5달러로 농지를 살 수 있었다. 이런 제도적 지원에 의해 많은 가구가 1870년대 켄터키, 미주리, 일리노이 주로 이주하며 홈스테드에 참여한다. 그러나 가물고 척박한 조건에서 작황이 나빴으므로 격년제로 농사를 짓는 드라이 농법이 도입되고, 가장 적합한 작물인 밀을 대량 경작하게 된다. 이후 미국 국토의 10%인 1억6천만 에이커의 땅이 홈스테드 자영지가 된다. 당시로서는 특이하게 여성과 이민자에게도 허용한다. 1850년~1890년 동일한 면적의 농지에서 산출되는 농작물 수확량이 3배로 늘어난다. 1890년대에는 오히려 잉여생산이 문제가 된다. 게다가 밤에는 춥고 낮에는 뜨거운 열악한 주거 환경에 고전하다가 1900년경 홈스테드의 80%가 5년을 채우지 못하고 포기하는 상황이 된다. 이 제도는 1916년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법으로 확대된다. 기계영농으로 일손을 줄이면서 생산성을 크게 높일 수 있게 되고, 홈스테드 법으로 농지를 미시시피강 서쪽의 대초원으로 넓히고, 기차와 철도의 보급으로 판매망을 넓히고, 폐기물 발생을 줄이고 농가의 수익을 높이는 등 산업혁명기 미국의 농업은 일대 혁신을 이루게 된다. 서부로의 골드 러시
홈스테드 법이 변화를 일으키던 시기, 미국 서부로의 황금 러시가 일어난다. 이 과정에서 약탈로부터 자기방어를 할 수 있도록 비질란트법(Vigilante Act, 自警法)이 제정된다. 서부영화에서 보았듯이, 보통 사람들도 로프와 총을 소유하게 된 것이다. 최근 미국에서 계속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총기 소지는 미국 산업혁명기 광물자원을 찾아 떠나던 서부개척시대의 사회문화적 유전자라 할 수 있다. 카우보이의 등장 1860~90년 산업화 과정에서 미국 인구는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난다. 식량 공급을 위해 축산업도 활기를 띤다. 텍사스에서 방목한 소떼는 시카고, 피츠버그, 센트 루이스 등 대도시로 이송해야 했고, 소몰이 카우보이의 역할이 중요했다. 텍사스에는 4백만 마리의 소가 있었다. 캔자스 주에는 카우보이 집합소가 만들어진다. 이들은 소떼를 이끌고 텍사스로부터 대도시로 이동한다. 그 과정에서 홈스테드 농지는 엉망이 되고, 농가들이 반발한다. 1890년 무렵에는 기차를 이용해 가축을 옮기고, 그에 따라 카우보이 절정시대가 저물어간다. 도시의 성장,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2차 산업혁명으로 미국은 시골 풍경의 농업국가에서 공장 위주의 산업국가로 변모한다. 지역적으로는 북부 도시에서 혁신 산업이 성장하고 있었고, 남부 지역은 여전히 남북전쟁의 폐허에서 복구되지 못한 상태였다. 이민자들도 엘리스 섬의 이민국을 거쳐 동북부 지역에 거주하며 거기서 일하고 있었다. 소규모 영세 기업은 대기업(corporation)으로 합병되고 있었고, 그 배경에는 정부의 지원이 큰 몫을 한다. 미국의 산업혁명은 산업혁신에서 나아가 미국 전체의 모습을 바꾸게 된다. 도시의 출현이 상징적인 변화였다. 1860~1910년 사이에 도시 인구는 6백만 명에서 4천4백만 명으로 늘어난다. 대도시도 생긴다. 1870~1890년 사이 뉴욕은 인구 200백만 명, 시카고와 필라델피아는 인구 100백만의 대도시로 성장한다. 볼티모어, 보스턴, 센트 루이스도 19세기 후반에 성장한 도시였다.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든 이유는 일자리 때문이었다. 일자리를 찾아 미국으로 이민 러시 산업혁명으로 미국 땅의 일자리가 늘어나자, 1870년 무렵 이민 러시가 시작된다. 연간 40만 명이 엘리스 아일랜드(Ellis Island)를 거쳐 들어오던 이민 인구는 1882년 80만 명으로 늘어난다. 당초에는 영국과 북유럽에서 들어오고 있었으나, 1880년대 후반에는 동유럽, 서유럽, 남아프리카, 남미로부터 들어온다. 세계 곳곳으로부터 이민 인구가 몰려들면서, 새로운 사회문제가 대두된다. 이민자들은 대부분이 빈곤하였고, 도시의 보건 위생, 쓰레기 처리, 혼잡, 안전 등의 위협이 커진다. 이민으로 인해 문화적인 충격까지 겹치며 복합적인 양상으로 전개된다. 2차 산업혁명기 화학산업의 부상 19세기와 20세기의 화학기술에는 두 가지 차이가 있었다. 총괄공정 대신 연속흐름법의 도입, 촉매의 사용이 그것이다. 그로써 공정단계의 자동제어가 진전된다. 자동제어를 위해 화학산업은 가장 먼저 컴퓨터를 도입한다. 제품 품질이 좋아지고 생산율도 올라간다. 그리고 촉매 사용으로 석유화학공업이 크게 발전한다. 화학산업 대기업의 약진 2차 산업혁명기에는 산업의 사회사적 측면에서도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난다. 산업의 독점체제로 안정적인 시장을 확보하고, 운영관리상 조직화, 체계화, 표준화가 이루어진다. 1차 세계대전은 화학산업의 판도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전쟁으로 인해 유기화학에 의한 폭약 수요가 급증하고, 특허를 둘러싸고 화학산업 구조까지 바뀌게 된 것이다. 대기업으로 통합해 특허를 매입하고, 전문 인력을 스카웃하고, 대형 연구를 수행하는 거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1920년대에 화학산업계는 3개의 대형 회사, 유니언 카바이드, 듀퐁, 얼라이드 케미컬의 대기업으로 판이 짜인다. 석유화학공업시대의 개막 원유는 에너지원으로서 필수불가결의 자원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것을 원료로 신소재를 합성하는 산업이 또 하나의 축이었다. 유기화합물을 만드는 데 필요한 탄소 골격을 석유로부터 얻게 된 것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만일 원유로부터 신소재를 합성하는 길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면, 현대문명의 물질적 풍요는 한낱 꿈이었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석유화학공업은 원유로부터 에틸렌 등의 기초화학 원료를 얻고, 그것들로부터 갖가지 화합물을 대량으로 합성하는 장치산업이다. 모든 분야로 침투해 현대문명의 핵심 산업으로 발돋움한다. 그러나 2차 대전 이후 급팽창한 석유화학산업은 환경과 생태계에 큰 충격을 주는 것으로 밝혀진다. 가장 획기적인 합성 산물인 플라스틱 등 고분자화합물이 생태계에서 잘 분해되지 않고, 악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2차 산업혁명기 플라스틱 합성은 반(semi)합성 연구에서 시작된다. 2차 산업혁명에서는 오늘날 글로벌 이슈로 대두된 플라스틱이 합성되고 있었다. 플라스틱을 만들어낸 고분자화학공업은 1860년대 천연 고분자 화합물을 인공적으로 변형시키는 반합성(semi-synthetic) 연구에서부터 시작된다. 이후 1930년대 활성화된다. 파크신, 레이온 반합성의 최초의 기록은 1862년 런던의 국제대박람회(Great International Exhibition)에서 공개된 파크신(Parkesine)이다. 파크스(Alexander Parkes)는 전기 절연체를 얻으려다 파크신을 얻는다. 구부릴 수 있고, 투명하고, 냉각 성형되는 등의 물성으로 파크신은 고무를 대체하게 된다. 1865년 미국의 하이야트(John W. Hyatt)는 열가소성의 셀룰로이드(Celluloid)를 합성한다. 후에 인화성이 적은 아세트산 셀룰로즈로 개량해 영화 필름 등의 재료로 쓰인다. 당구공 제조에도 쓰이다가 1890년대에는 값비싼 거북이껍질, 상아 등을 대체한다. 1891년에는 파리에서 레이온(Rayon, Louis Marie H. Berniguat 개발)이 출현한다. 목재 펄프를 정제해 셀룰로즈 섬유로 만든 레이온은 그 광택으로 실크 대용품이 된다. 초기엔 인화성이 높았다. 1897년 독일의 스피틀러(A. Spitteler)는 우유의 카제인과 포름알데히드를 중합시켜 상품명 갈라리드(Galalith)를 출시한다. 이 반(semi)합성의 고분자는 열가소성이 아니라 열경화성이라는 점에서 셀룰로이드와는 달랐다. 용도는 단추 제작에 널리 쓰인다.
진짜 플라스틱의 등장 열경화성의 완전한 인공 플라스틱은 20세기에 출현한다. 1907년 미국 베클란드(Leo Baekeland)가 개발한 베클라이트(Bakelite)가 효시다. 페놀과 포름알데히드의 축합반응으로 얻은 베클라이트는 열경화성과 스트레스 내구성으로 1930년대 시계, 전화기 등의 재료로 인기를 누린다. 베클란드는 이미 벨록스(Velox) 특허를 코닥사에 넘겨 이미 부자가 된 뒤였다. 같은 시기 영국의 전기공학자 스윈번(J. Swinburne)도 절연체 연구를 하다가 똑같은 결과를 얻는다. 그러나 베클란드보다 하루 늦게 특허를 출원하게 된다.
베클라이트의 개발은 과학사의 ‘동시발견의 사례’에 속한다. 아무런 교신이 없이 독립적으로 연구하면서 똑같은 시기에 똑같은 발견 또는 발명을 하는 경우가 많다. 과학사에서 미적분학(Calculus)의 사례는 유명하다. 영국의 뉴튼(Isaac Newton)과 독일의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사이에 우선권을 둘러싸고 양국 과학자사회 사이에서 오랫동안 논쟁을 빚는다. 결국 두 거물이 독립적으로 연구해서 동시에 창안한 것으로 결론짓고 있다.
셀로판, PVC, PVDC 합성 1912년에는 스위스 화학자 브란덴버거(Jacques E. Brandenberger)기 셀로판(Cellophane) 특허를 획득한다. 셀룰로즈(cellulose)와 투명(diaphane; transparent)의 합성어였다. 방수성 탁상보를 만들기 위한 연구로, 생산공장(CTA)은 프랑스에 세워진다. 1912년 미국의 휘트만(Whitman)사는 캔디 포장에 셀로판을 사용한다. 1924년까지는 프랑스산을 수입한다. 1927년에 듀퐁사가 습기를 완전 차단하는 개량에 성공하면서 셀로판은 모든 가정으로 들어가게 된다. PVC(Polyvinyl Chloride)는 흔히 비닐이라고 부르는 고분자다. 원래 고무 대용으로 1872년에 개발되나 1926년까지 상용화되지는 못했다. 2차 대전 이전에 독일과 미국에 공장이 건설되고, 의료용, 건축용으로 널리 쓰이게 된다. 한편 PVC와 이름이 비슷한 PVDC(Polyvinylidene Chloride)는 1933년 다우 케미컬의 실험실에서 우연히 만들어진다. 초기에는 높은 저항성과 소금물 부식성이 없다는 특성으로 전투기 코팅의 군사적 용도에 쓰인다. 그러나 투명하고 질기고 점착성이 있어 1953년 사란(Saran) 랩으로 쓰이고, 육류 등 식품 포장에 널리 쓰이게 된다. PE, PP, PS의 합성
PE(Polyethylene)는 1898년 독일 화학자 페크만(Hans von Pechmann)이 우연히 만들어낸다. 원래 공정은 고온고압법이었고, 생성물은 저밀도 PE(LDPE)였다. 영국 ICI(Imperial Chemical Industries)사가 2차 대전 터지던 날 최초 생산한다. 초기엔 특수 전기부품으로 쓰이다가 주방용 가정용품으로 확대되고, 미국에서 대량생산된다. 1953년부터는 저온저압법에 의해 고밀도PE(HDPE)까지 생산하게 된다. 이 공정을 개발한 것은 각각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독자적으로 연구하고 있었던 지글러(K. Ziegler)와 나타(G. Natta)였다. 동시 발견의 사례로 이들은 나란히 1963년 노벨화학상을 공동수상한다. 이어서 나타는 지글러 형태의 촉매를 써서 1954년에 PP(Polypropylene) 합성에 성공한다. 1957년 이탈리아 몬테카티니(Montecatini)사가 PP 생산에 들어가면서, 몰딩, 필름, 섬유 등 다양한 형태로 널리 쓰이게 된다. 폴리스티렌(Polystyrene PS)은 1930년대 개발, 40년대 생산으로 내충격성을 높이면서 아세트산 셀룰로즈를 대체하게 된다. 폴리에스터(PET) 합성 폴리에스터(Polyester)는 1950년대 듀퐁의 대크론(Dacron) 섬유 브랜드로 출시됐다. 물빨래가 가능한 신소재 섬유로 각광을 받으며, 80년대 패션 혁명을 일으킨다. 머리글자를 따서 명명한 PET(Polyethylene terephthalate)는 폴리에스터 계열로, 병 등 용기로 쓰인다. 섬유의 경우에는 보통명으로 폴리에스터라 부른다. 섬유용이 세계 폴리에스터 생산량의 60% 이상이다. 폴리에스터는 세계 폴리머 시장의 18% 수준이고, 폴리머 가운데 PE, PP, PVC 다음으로 생산량 4위다.
1939년 뉴욕 세계박람회에 등장한 나일론 1939년 뉴욕 세계박람회에서 구름같이 몰려든 사람들은 신소재 시대가 열렸음을 실감한다. 나일론(Nylon) 스타킹의 출현이다. 듀퐁의 캐로더즈(Wallace H. Carothers)가 개발한 나일론은 합성섬유의 대명사다. 1910년 무렵까지 화약 제조공장이었던 듀퐁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점적 군수산업체라는 이미지를 벗기 위한 시도의 일환으로 유기화학 기초연구와 염료 응용연구실에 예산을 집중 투입한다. 그러나 기초 역량이 미흡함을 절감하고, 독일의 기술자에게 손을 내민다. 1930년에는 예기치 않게 합성고무 네오프렌(neoprene)을 만들게 되고, 10년 뒤 생산체제로 회사에 큰 수익을 안겨준다. 듀퐁의 캐로더즈의 죽음 이후 스타인이 승진해서 자리를 떠나면서, 캐로더즈는 갈등에 빠진다. 상용화가 확실한 제품을 개발하라는 경영진의 압박에 심적인 부담을 느끼며, 다시 나일론 연구로 돌아온다. 결과를 얻는 데에는 성공한다. 그가 처음 개발한 것은 헥사메틸렌디아민과 아디프산, 즉 탄소사슬 6개짜리의 두 가지 원료를 중합시킨 것으로 파이버 66이라 불렀다. 그가 죽은 뒤 발표된 1938년의 보고서에는 ‘석탄과 공기와 물로부터 거미줄 같은 강철보다 강한 실’의 개발에 성공했다고 적혀 있었다. 나일론은 1939년 생산되기 시작한다. 30년대 미국은 실크 수입의 90%를 일본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 중 75% 이상이 스타킹 제조에 쓰였다. 1939년에 나일론 스타킹이 시판되자 3시간 동안에 4천 켤레가 팔린다. 나일론과 태평양전쟁 1942년 일본의 진주만 폭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실크 수입이 두절된다. 이제 나일론은 민수용은 중단되고 모두 군수용으로 투입된다. 미국 여성들은 나일론은 군으로 보내고, 스타킹 대신 물감으로 다리에 스타킹 선을 그려 넣었다고 한다. 전쟁에서 미국이 이긴 것은 나일론을 파라슈트, 로프, 자켓 등의 군수용으로 유용하게 썼기 때문이란 말도 있다. 2차 대전 중 플렉시글라스(plexiglass), 실리콘, 우레탄 등이 개발돼 군수용으로 쓰인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나일론의 인기가 다시 치솟는다. 1만3천 켤레의 나일론 스타킹을 사는데 4만 명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값비싼 실크를 대체해서 의류 등 용도가 계속 확대된다. 과학사에서 나일론의 개발은 ‘기초연구에 바탕한 산업적 기술’과 ‘전문 공학자이자 경영인의 체계적 과학적 관리’가 빚어낸 결실로 평가된다. 기업의 기초연구 투자. 연구행정의 탁월한 리더십이 캐로더즈의 불행한 죽음에도 불구하고 신소재 시대를 연 것이고, 2차 산업혁명이 불러온 변화였다. ‘플라스틱 시대’는 2차 산업혁명에서 예고되고 있었다? 인류사회는 과학기술 발전에 의해 온갖 종류의 플라스틱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값싸고 편리함에 의존도가 점점 심해졌다. 일회용으로 쓰고 던져버리는 사회(a throw away society)가 됐다. ‘플라스틱 시대’(The Plastic Age)의 문명이다. 60년대 세계 플라스틱 생산량은 400%로 늘어난다. 세상에 다시없는 축복의 신소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레이건 대통령이 대통령 되기 전에 ‘플라스틱 용기가 이렇게 좋다’면서 광고에 출연한 적도 있다. 플라스틱 사용, 무엇이 문제인가. 플라스틱이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가 어렵게 됐다. 플라스틱을 자연 자원으로 대체한다면 그것이 또 대재앙을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이 문제다. 플라스틱은 햇빛과 공기에 의해 분해되거나 미생물에 의해 분해된다. 그러나 용기나 포장으로 쓰는 경우 내용물을 담고 있는 동안 분해돼 단량체(monomer)가 녹아 나오면 오염원이 된다. 따라서 이를 막기 위해 다시 피막을 입히는 등 보완을 해야 한다. 미생물에 의해 생분해되는 플라스틱은 광분해되는 플라스틱과는 물성이 다르다. 예컨대 폴리스티렌(polystyrene)에 카르보닐기를 도입해서 만든 생분해성 재질의 컵은 바깥에 2주일만 방치해도 잘 분해된다. 그러나 그 용도에 따라 사용 도중에 분해되면 오염원이 되고, 다른 폐기물에 섞이면 생분해성은 거의 무효가 될 수도 있다. 이래저래 까다롭다. 고분자 화합물은 오존에 의해 손상되므로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항산화제, 가소제 등을 넣는다. 따라서 용기나 포장재로 사용할 경우 분해되어 오염을 유발한다. 퇴비 제조의 경우에도 당초에 첨가한 유해 성분이 문제가 된다. PVC는 염소를 함유하고 있어 가열할 때 염화수소를 방출한다. 소각하면 소각로를 부식시키고, 대기에 유출되면 식물과 사람, 생태계 전반에 해를 끼친다. 폴리에스테르는 미생물에 의해 생분해가 가능하다. 분해되는 과정에서 첨가물로 넣은 가소제 등이 방출돼서 유해하다. PVC를 대체하기 위해 개발된 아크릴로니트릴은 쓰고 버린 뒤 소각할 때 시안화수소(청산가스)가 방출된다. 자동차 타이어와 스티로폼을 태우면 검댕이와 연기가 발생한다. 2차 산업혁명과 자연 생태계 훼손 2차 산업혁명 초기인 1870년대부터 광물, 동물, 식물 자원의 남용과 생태계 훼손이 가시화되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자연보호운동이 일어난다. 1880년에는 의회가 법제화에 나서고,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자연보존구역을 설정해 2천만 에이커를 보존한다. 1888년에 시오도어 루즈벨트가 대통령이 되기 전에 ‘Sportsman’s Conservation Organization’을 결성한다. 1891년에는 산림보존법(Forest Reserve Act)이 통과돼 보존 가치가 있는 공공 토지를 대통령이 보전 지정할 수 있도록 한다. 1892년에는 27명이 시에라 클럽(Sierra Club)을 결성하고, 1899년에는 수질보존법 제정으로 하천, 운하, 수로에 폐기물 투기를 금지한다. 이것이 2차 산업혁명 중반에 이루어진 환경보전 규제였다. 19세기에 온실효과로 인한 기후변화가 예측됐다. 19세기 과학자들은 20세기에 닥쳐 올 환경재앙을 예견하고 있었다. 온실효과로 인한 기후변화도 19세기 초에 예측된다. 최초로 거론한 과학자는 프랑스 과학자 푸리에(Jean Baptiste Joseph Fourier, 1768-1830) 남작이다. 그는 지구 대기권에서 이산화탄소, 수증기 등의 농도가 변화해 기상이변이 야기될 것이라고 보았다. 당시 실험결과들도 이런 추론을 뒷받침해 주고 있었다. 영국의 틴달은 1872년 이산화탄소의 온실효과를 예측하는 논문을 발표한다. 1872년 영국에서 발간된 ‘화학적 기후학의 시초’에서는 산성비(Acid Rain)라는 현상이 최초로 언급된다. 1891년 당대의 최고 과학자인 스웨덴의 아레니우스(Svante August Arrhenius)는 산업화에 의한 환경오염이 대기권의 이산화탄소 농도를 두 배로 증가시키고, 그 결과 지구 평균기온이 섭씨 5도 정도 올라갈 수 있다고 예측했다. 산업화 역사 속의 대기오염 에피소드 석유화학산업의 공로는 실로 컸다. 그러나 1차, 2차 산업혁명을 거치며 산업발전으로 환경오염과 생태계 훼손이 심화되고 있었다. 미국의 산업혁명기에 환경오염은 사회적 이슈로 대두된다. 초기의 대기오염 방지 조치는 예컨대 1876년 세인트 루이스(St. Louis)에서 공장의 굴뚝을 이웃 건물보다 적어도 20피트 이상 높게 세우도록 한 것이었다. 시카고는 1881년 매연을 내뿜는 행위에 대해 벌금을 물도록 규정한다. 스모그(smog, smoke+fog)는 데보에(H. A. Des Voeux)가 창안한 용어로 런던 형과 로스앤젤레스 형으로 구분된다. 1차 산업혁명 이후 석탄을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면서, 영국 런던은 1880년 1천 명 이상의 희생자를 낸 '살인 스모그(killer smog)'를 겪게 된다. 당시 런던의 기온은 약 10도였고, 안개가 뒤덮여 상대습도가 거의 100%인 저온다습의 상태였다. 런던 스모그 재앙 런던 스모그는 계속해서 52년, 56년, 62년에도 각각 4천 명, 1천 명, 7백 명의 생명을 앗아간 대기오염 사건을 일으킨다. 런던 형 스모그는 주로 겨울날 이른 아침 상대습도가 높을 때, 햇빛에 의한 화학반응이 없는 상태에서 일어난다. 영국 정부는 56년 '대기청정법'을 제정해, 공장 굴뚝에서 나오는 매연이 시간당 10분 이상, 링겔만 챠트의 2도를 넘지 않도록 규제한다. 벨기에 뮤즈 계곡 대기오염 사건 1930년에는 벨기에의 뮤즈(Meuse) 계곡에서 대형 대기오염 사건이 발생한다. 이 계곡(깊이 1백여 미터, 길이 25킬로미터)에는 화력발전소와 황산공장 등이 몰려 있었다. 공장 배출 오염물질이 짙은 안개와 기온역전((대기 윗층의 공기가 덥고 아래층의 온도가 낮아져서 대기 순환이 억제되는 현상), 무풍 등의 악조건과 겹친 상태로 사흘간 계속되면서, 60여 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의 환자가 발생한 것이다. 미국 펜실바니아 도노라 계곡 대기오염 에피소드 미국에서는 1948년 펜실바니아주의 도노라(Donora) 계곡의 대기오염으로 20여 명 사망에 6천여 명 환자가 발생한다. 철강공장, 황산공장 등이 몰려 있는 조건에서 바람이 불지 않고 기온역전 현상까지 겹쳐 이산화황 농도가 치솟았다. 5일간 지속된 스모그로 훗날까지 마을 인구 1만4천명의 반이 피해를 입는다. 플루오르화물과 황산화물이 주요 원인으로 알려지고, U.S. Steel 회사의 자회사인 ‘Donora Zinc Works’와 ‘American Steel & Wire’ 공장이 원인이라고 고소를 당하지만, 회사 측은 천재(天災, ‘Act of God’)라며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사건은 1951년에야 판결이 나오고, 회사 측은 235,000 달러 벌금을 물게된다. 고소에 참여한 피해주민 수는 80명이었다. 당시 사망자의 혈중 플루오르화물 농도는 치사량보다 몇 배나 높았다. 회사 측은 사태 파악에 필요한 증거를 은폐한 혐의를 받았다. 농작물과 가축의 피해도 컸다. U.S. 스틸의 도노라 소재 두 개 회사는 1966년에 문을 닫는다. 도노라 사건의 영향으로 1963년 청정공기법(Clean Air Act)가 제정된다. 이 법은 미국의 최초이자 가장 영향력이 큰 환경법이자 세계적으로 가장 포괄적인 대기법안으로 평가된다. 로스앤젤레스 광화학 스모그 로스앤젤레스 형 광화학 스모그는 1944년에 처음으로 알려지게 된 후발의 대기오염 현상이다. 오늘날에는 세계 도처에서 런던 형과 LA 형의 두 가지 형태가 두루 피해를 입히고 있다. LA형 스모그는 1951년 로스엔젤레스 대기오염대책기구(ADCD) 자문역이던 하겐스미트 (A.J. Haagen-Smit)가 그 원인을 규명한다. 일차 대기오염 물질의 광화학 반응으로 이차 오염물질(오존, 이산화질소 등)이 생기는 것이 원인으로 밝혀진다. 일차 오염물질은 주로 자동차가 내뿜는 산화질소, 탄화수소, 일산화탄소 등이다. 대체로 기온이 높은 화창한 날에 청명하고 습도가 낮은 상태로부터 차츰 발생한다. 겨울날 따뜻할 때도 생기고, 대체로 대낮에 절정을 이룬다. 이후 1946년 일본의 요코하마 사건, 1950년 멕시코의 석유산업단지 포자 리카(Poza Rica) 사건(황화수소 오염) 등은 20세기 대기오염의 대표적인 에피소드였다. 일본의 요카시는 54년부터 석유 콤비나트 지역으로 변모하면서, 61년 말부터 기관지 천식 환자가 크게 늘어났고, 증세는 '요카시 천식'이라 명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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